독서

「심판」- 프란츠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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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7 Singapore

188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라하에서 태어난 카프카는 이기적이며 돈에 환장한 아버지와 그의 사업을 도와주느라 자식들에게 무신경했던 어머니 아래서 자랐다.「심판」에서 주인공 요제프 K가 소송을 진행하며 나오는 등장인물들과 사회적 배경은 자본주의와 관료주의에 대한 카프카의 관점을 투영한다. 옮긴이의 해석에 따르면 「심판」에서 카프카는 그의 관점-자본주의의 비인간성과 관료주의의 부도덕함-을 인간이 가진 필연성, 즉 태어난 사람은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삶의 굴레에 비유했다고 말한다.

소설은 주인공인 요제프 K가 어느 날 아침 하숙집 방의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시작된다. 불친절하게도 소설의 시공간적 배경이나 K라는 이름을 제외한 주인공의 다른 정보는 제공되지 않는다. 하숙집 방의 문을 나서자 마자 K는 양복 차림의 낯선 남자 두 명을 마주한다. 말단 감시인인 이 둘은 갑자기 K가 기소되었다고 말하며 남의 집에서 추태를 부린다. 하지만 감시인의 역할 답게, 우리가 흔히 ‘기소’하면 생각나는 피고를 체포하는 이미지 대신 그들은 단순히 K를 감시하며 그를 괴롭힌다. K는 도대체 자신이 어떠한 죄로, 왜 기소되었는지 이 감시인들과 주임에게 질문하지만 이들에게서 돌아오는 답변은 형식적이며 이미 기소되었으므로 죄명을 아는 것이 무엇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반문한다.

평범한 일상 한 가운데 갑자기 들어닥친 심판. 초기에 주인공은 도대체 자신이 왜 기소되었는지도 모르는 날벼락을 부정하고 타락한 재판소 관리들이 이러한 음모를 꾸몄다고 생각해 더럽혀진 사법 제도를 자신이 바로잡겠거니 하고 다짐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논점이 다르기는 하지만 가파로운 절벽으로 돌진하는 군중 속에서 나 혼자 멈춘다고 영화에서처럼 사람들이 주인공에게 관심을 가지지는 않는다. 이내 주인공 K는 부패한 관료주의를 타파하겠다는 거룩한 사명은 무의식적으로 잊은 채, 제 자신을 잃고 재판소 복도에 눌러 앉은 여타 다른 피고인들처럼 단순히 무죄를 선고받기 위해 항소를 준비한다. 항소를 준비하는 동안 K는 변호사, 화가, 상인, 신부 등 다양한 인물을 만난다. 미완성인 장들이 많으니 완성된 장편 소설이었다면 분명 더 많은 인물들이 등장했을 것이다. 저마다 재판소와 관련이 있는 이러한 인물들을 만나며 주인공은 점차 자신이 무엇을 좇는 것인지 조차 잊어간다. 그러다가 소송의 덧없음을 깨달은 주인공은 마지막 장에서 제 자신을 칼로 찔러 죽는다.

소설에서 전반적으로 이목을 끄는 것은 주인공의 심경 변화다. 갑자기 들이닥친 기소와 소송이라는 족쇄에 주인공은 우리도 똑같은 상황이었다면 했을 법한 반응을 보인다. 그는 도대체 누가 자신을 기소했는지도, 무슨 죄가 뒤집어 씌워졌는지 그 불편하면서도 비인간적이고 부도덕한 현세계에 환멸을 느끼며 히스테릭하게 반응한다. 그러다가 사법제도에 벗어날 수가 없음을 깨달은 그는 변호사와 탄원서를 준비하고 사법제도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 포섭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다시 말해 K는 점차 자신의 죄명이 무엇인지 따위의 합리적인 논점에는 무감각해지고 점차 의미 없는 소송을 위해 의미 없는 시간과 자원을 쏟는다. 이렇듯 허무주의라는 소설 전반의 정체성이 주인공 K의 심경에서 까지 적용되는 지는 모르겠다. K는 돌연 10장에서 예고 없던 사형집행인을 기다리기 위해 옷을 말끔이 차려입었으며 자신의 죽음을 오히려 자신이 재촉한다. 초반에는 소송을 부정했으며 중반에는 소송을 이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희망을 잃진 않았지만 갑작스레 주인공의 심경이 극단적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K는 자신의 마지막 순간, 멀찍이서 희미하게 보이는 사람의 형상을 보고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저것은 누구일까? 친구인가? 착한 사람일까? 관계가 있는 사람일까? 도와주려는 사람일까? 단 한 사람인가? 그 모든 사람인가? 아직 구원의 여지가 있을까? 잊어버렸던 항변이라도 있는 것일까?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아무리 논리가 확고하다 해도 그러나 살려는 인간에게는 저항하지 못한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재판관은 어디 있는가? 결코 가보지 못한 상급 재판소는 어디 있는가?’

이 한 문단만 읽어도 주인공의 마지막 심경을 알 수 있다. 소설을 읽는 우리는 소설에서 등장하는 사법제도와 인물들을 관통하는 허무함을 쉽게 발견할 수 있지만, 소설 내 화자인 주인공 K는 자신의 마지막 순간까지 도저히 밝혀낼 수 없었던 재판관과 상급 재판소에 의문을 가진다. 또한 단순히 스치듯이 보았던 사람에 대해서도 온갖 쓸 데 없는 질문들을 쏟는다. 한 일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기 인생의 궁극적인 이유(소설에서는 재판관, 상급 재판소 및 밝혀지지 않은 ‘사법 제도’가 주인공이 소송 중 알아내야 할 궁극적인 이유에 속한다)도 알지 못하거니와 스치듯이 지나간 인생의 보잘 것 없는 것들이라도 우리는 알 수 있을까? 주인공은 소설 내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소송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끊임 없이 질문했지만 그것의 발끝도 알아내지 못하였으며 그러한 궁굼증은 다른 질문을 야기시켰다.

혹자는 저자 카프카가 「심판」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히 법치주의, 자본주의,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인간의 일생에 대한 덧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소설은 주인공이 아침에 잠에서 깨면서부터 시작된다. 잠에서 깨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주인공의 배경이나 시대상(소설을 읽어보면 배경이 저자가 활동하던 1900년대 초반이라는 것을 어림짐작할 수 있지만 애당초 시대상을 들어낼 만한 언급이 전혀 없다) 따위는 흘러가는 말로차 드러나지 않는다. 인간의 일생도 비슷하다. 어느 날 짠 하고 태어난 우리들, 주인공 K가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면서 소설이 시작되는 것과 비슷하다. 방 문을 나서니 도대체 형언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소송’이라는 굴레가 소설의 끝까지 따라붙는다. 즉, 「심판」에서 소송, 사법 제도, 기소, 유죄… 등이 궁극적으로 대변하는 것은 인간의 일생에 알 수 없는 목적과도 같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인간의 궁극적으로 가져야 할 목적의식이 무엇일까-자손 번식? 평등? 가난의 종말? 물론 이렇게 「심판」에서의 주인공은 우리의 일생과도 같다는 비유는 우리가 태어난 것이 끊임 없이 달라붙는 ‘피고’라는 머릿말처럼 우리의 매일매일 일상을 괴롭히지는 않으므로 조금은 극단적인 것 같다. 하지만 카프카 특유의 이야기를 푸는 방식으로 드러내는 허무주의는 신기하게만큼 독자를 몰입시키고 불편하면서 찝찝한 기분을 들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아래는 「심판」9장 ‘대성당에서’ 부분에서 나오는 신부의 이야기다. 흥미로우니 한 번 읽어보면 좋다.

법 앞에 문지기가 서 있다. 한 시골사람이 이 문지기에게 와서 법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지금은 들여보낼 수 없다고 말한다. 시골사람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럼 나중에는 들어 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 문지기는 말한다.

‘그럴 수는 있지만 지금은 안 돼.’ 법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항상 열려 있고 문지기는 옆으로 물러서 있기 때문에 시골사람은 몸을 구부리고 그 안을 들여다보려 한다. 이것을 본 문지기는 껄껄 웃으며 말한다. ‘그렇게 들어가고 싶거든 내가 금지하는 것을 어기고라도 들어가 보게나. 그러나 내겐 권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둬. 그리고 나는 가장 낮은 문지기에 지나지 않아. 문만다 문지기가 서 있으며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권력이 강하지. 세 번째 문지기를 보면 나도 겁이 나.’ 시골사람은 이런 난관을 예상하지 못했었고, 누구나 언제라도 법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제 털외투를 입은 문지기를 좀 더 자세히 관찰하며, 그의 크고 뾰족한 코와 타타르인 같은 길고 가느다란 검은 수염을 보고는 차라리 입장이 허락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심한다. 문지기는 의자를 내주며 문 옆에 앉게 한다. 여러 날 여러 해 동안 그는 거기 앉아 있다. 시골사람이 안으로 들어가려고 갖은 애를 쓰고 간청을 해서 문지기는 지쳐버린다. 문지기는 때때로 시골사람에게 간단한 심문을 하며, 그의 고향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를 묻는다. 그러나 그 것은 높은 사람들이 괜히 해보는 것과 같은 뜻 없는 질문이고, 결국은 언제나 아직 들여보낼 수 없다고 말했다. 여행을 위해 잔뜩 준비를 해갖고 온 시골사람은 대단히 가치 있는 것까지도 모두 문지기를 매수하기 위해서 써버린다. 문지기는 무엇이든 다 받기는 하되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해보지 않았다고 후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받는 것뿐일세.’

여러 해 동안 시골사람은 끊임없이 문지기를 지켜보았다. 다른 문지기들이 있다는 사실은 잊어버리고 시골사람은 이 첫 번째 문지기만을 법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는 유일한 장애물로 여긴다. 처음 몇 해 동안 시골사람은 이 불행한 재난을 큰 소리로 저주하지만 늙어서는 그냥 혼자 투덜거린다. 그는 어린아이같이 되었고, 여러 해 동안 문지기를 관찰한 끝에 문지기의 털외투 깃에 벼룩이 있는 것을 알아채고는 문지기가 마음을 돌리도록 도와달라고 벼룩에게 애원한다. 마침내 그는 시력이 약해져서 주위가 정말로 어두워진 것인지 자신의 눈이 흐려진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제 암흑 속에서 법의 문들을 꿰뚫고 영원불멸의 불빛이 새워나오는 것을 인지한다. 이제 그는 오래 살지 못한다. 죽음을 앞둔 그의 머릿속에서 지난 세월 동안의 모든 경험이 한 가지 질문으로 집약된다. 그것은 이제까지 문지기에게 물어본 적이 없는 질문이다. 굳어진 몸을 일으킬 기력도 없어 시골사람은 문지기에게 눈짓을 한다. 서로 키가 다르기 때문에 문지기는 허리를 깊숙이 구부리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이제 또 무엇을 알고 싶은 거지?’ 문지기가 묻는다. ‘당신은 지치지도 않는군.’

‘모든 사람들이 법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밖에는 아무도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원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이죠?’ 시골사람이 묻는다.

문지기는 이미 시골사람의 최후가 가까워진 것을 깨닫고 멀어 가는 그의 귀에 들릴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외친다.

‘이 문은 당신만을 위한 것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들어갈 수 없었어. 이젠 가서 문을 닫아야지.’

신부가 주인공에게 전해준 위 이야기는 「심판」의 줄거리를 짧은 우화에 빗대어 요약해주는 듯 하다. 시골사람은 법이라는 문에 들어가려 하며 다른 사람들 또한 법에 열광하는 것을 알지만 정작 열려있는 문 안을 들여다 본 것이 다여서 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시골사람은 나이가 들어 죽음을 앞둘 때까지 문 안의 세계를 경고한 문지기의 말만 들었지 정작 용기 있게 그 안을 들어가 보지도, 왜 아무도 문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지 문지기에게 질문하지도 않았다. 이 이야기는 「심판」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조금은 미련한 주인공(「심판」에서의 K와 이 우화에서의 시골사람)과 그 세계관 속에서의 궁극적인 목표(「심판」의 소송에서부터의 자유, 해방과 우화의 ‘법’이라는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 그리고 그 목표를 방해하는 요소(「심판」에서 비인간적인 자본주의와 부도덕한 관료주의, 그리고 우화에서의 문지기)로 구성된다. 시골사람은 미련하다. 법이라는 문을 통과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쏟아부었지만 무엇 하나 알아낼 수 없었다. 문지기가 정말로 장애물이었을까? 그는 자신을 무시하고 문을 통과해도 되지만 더 무서운 문지기가 있다고 경고했을 뿐 강제하진 않았다. 「심판」에서 주인공 K가 결론적으로 소송에서의 자유를 얻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듯이 시골사람 또한 문지기의 알량한 말에 좌우되어 법에 들어가지 못한 채 끝내 최후를 맞이한다. 혹자는 비관적인 시선에서, 이 두 주인공은 어찌 됐든 소송이나 문지기처럼 일종의 장애물적인 사회적 구조-자본주의, 관료주의 등-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대 사회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 혹자는 이러한 장애물에 가로막혀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던 두 주인공을 두고 도전해라, 용기를 내라 등의 교훈적인 결론을 이끌어 낼 수도 있겠다. 무엇이 저자 카프카가 진정으로 의도했던 것이든 간의, 소설이 주는 허무함과 아쉬움, 무언가 불편함과 등장인물과 소설 배경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게끔 만드는 특별한 구성이 있다. 심지어 「심판」은 미완성 장편소설이다. 쓰다 만 여러 미완성 챕터들이 있고, 본 소설에 엮인 8장 ‘상인 블로크·변호사 해약’ 또한 미완성 장이다. 카프카 사후 그의 친구가 남아 있던 원고를 출판사와 짜깁기해 출판한 책인 만큼 책에 실린 1에서 10장까지의 배열 순서에도 논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에는 특별한 시공간적 제약이 없이 사건을 위주로 전개되기 때문에 주인공의 소송 과정을 흥미롭게 관찰할 수 있다. 각 장들은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며 전개한다. 그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주로 K가 자신의 소송에 도움이 될 만한 인물이나 정보를 얻어내기 위함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도, 심지어 자신의 숙부마저 비관적인 인물로 해석된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변호사, 상인, 화가, 비서, 신부, 은행장-이 등장하는데 이는 꼬리에 꼬리를 잇는 관료주의를 비판하기 위함일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주인공은 자신의 최후에 ‘재판관도, 상급 재판소도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소송에서 이기려면, 해방되려면 최소한 재판관이라도 어디에 있는지, 아니 있긴 한건지라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어쩌면 그는 무의미한 싸움, 처음부터 벗어날 수 없는 소송에서 벗어나기 위해 허무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허무함을 깨달아서, 신부님의 시골사람 이야기에서 자신이 그 헛된 시골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려 죽음을 받아들인 것일까.

3줄 요약
줄거리
1. 주인공이 자다 일어났는데 갑자기 자기가 기소되었다고 함.
2. 기소가 되어 소송을 진행하는데 도대체 자기가 왜 기소되었는지 따위는 알 수가 없음.
3. 나중에는 이런 불합리적인 상황에 적응이 되어 소송에서 이기기 위해 노력하지만 덧없음을 깨닫고 (자살은 아니지만) 비슷하게 칼을 찔러 죽음.

나름대로 해석
1. 소설의 내용이 한 인간의 일생을 비유한다는 해석. 주인공이 어느 날 일어나 이유도 모른 채 재판의 피고가 되듯이 우리도 어느 날 갑자기 태어나 의미 없는 목표를 좇으며 살아감.
2. 주인공이 소송에서 해방하려는 헛된 노력 = 우리를 둘러싼 사회적 불합리함(자본주의, 관료주의 등)에서 벗어나려는 헛된 생각.
3. 허무주의 소설임.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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